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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시에서 나는 항상 이방인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면 40살의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과거의 삶에 대한 기억들도 나이가 들어 풍화되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까?

오늘 이른 새벽, 무언가를 보던 내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또 울었다. 커다란 패배감, 그리고 오랫동안 눈과 귀, 그리고 입을 닫고 부정하고 있던 어떤 사실을 인정하는,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는 굴욕적인 기분까지 느끼면서 말이다. 하늘에서 날 바라보고 있을 돌아가신 엄마에게, 나는 혼잣말 같은 기도를 했다.

"엄마! 그래, 그리워... 그럼에도 그때가 그리워. 엄마가 날 낳았던 도시. 그 도시에 다시 돌아왔을 땐 엄마가 대신 새엄마라는 사람이 내 옆에 있었어. 두 번째인 내 고향에서의 삶은 매일 같이 폭력을 일삼던 새엄마와 사이코패스 같은 아버지 밑에서 초등학교 1년부터 고3 수능을 볼 때까지 살아야 했어. 난 그 도시를 너무나도 싫어했어. 그 지옥 같았던 하루하루가 꿈이길 기도했어. 아버지의 불륜과 갑작스러운 이혼으로 서울로 이사가 결정되었을 때, 정말 행복했어. 한번도 느껴본 적 없던 행복이었어. 꿈에서 깨어난 것 같다고, 드디어 악몽에서 깨어난 것 같다고 등교길 이른 아침의 파란 하늘을 보며 엄마에게 외쳤었지."

그 도시를 떠난 이후, 10년 전 출국을 앞두고 유럽 생활에 필요할 서류들을 발급받기 위해 단 한 번 졸업한 고등학교를 방문했던 것이 전부였다. 나는 서류를 받자마자 단 1초라도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도망치듯 그 도시에서 황급히 빠져나왔다. 그 도시를 떠난 지 20년, 그리고 해외 생활 10년 동안 잠깐이라도 그리움이나 추억 같은 것을 떠올린 적이 없었다. 정말 그렇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인간은 고독하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 혹은 철학,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타향살이 하며 고독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외로움은 몇 배가 더해졌다. 한국을 떠난 지 10년이나 되었으니 그런가 보다 하며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태연한 척을 하면 할 수록 가슴 한구석의 균열은 자꾸 커져 갔다. 공허함은 나 마음과 머리를 잠식했다. 결국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리와 마음을 잠식했다. 감정도 조금의 의욕도, 심지어 기쁨과 감사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점점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새벽 3시,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어떤 단어를 검색했다.

'ㅇㅇㅇ의 거리뷰' 수십 개의 결과물 중에 동영상 하나를 골랐다. 누르는 손길이 떨렸다. 그리고 1분도 되지 않아 눈물이 터져 나왔다. 폭포수 같은 눈물... 큰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숨을 고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그 빌어먹을 도시가 그립다고, 나의 10대 시절이 그립다고, 지옥 같은 삶이었지만 잠깐 숨통이 트였던 순간이 있었다고, 그 악마 같은 계모에게 가끔 정을 느꼈고 함께 웃기도 했다고...'

그 거리, 그 동네... 내가 살던 곳이 아닌 다른 구의 다른 동에 위치한 곳이었다.

새엄마의 여동생, 그러니까 나에겐 '새 이모가 되시는 분'이 우리와 같은 도시에 살았다. 그 이모는 다른 구, 다른 동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모에겐 딸이 있었다. 나와 같은 나이였다. 새엄마는 종종 그분의 가게 일을 도왔다. 그때마다 이모는 나를 그 동네로 초대했다. 주로 토요일이었는데, 나는 상냥했던 이모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분의 딸도... 수업이 일찍 끝나는 토요일에 초대받으면, 서둘러 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목적지인 가게까지 숨이 차도록 뛰어 도착하면 나를 반겨주는 이모와 그럴 때만큼은 친절한 척을 하는 새엄마와 이모의 딸-'나와 동갑이었던 그녀'를 만났다.

이모는 우리에게 맛있는 거 사먹고 실컷 놀다 오라며 돈을 주었고 우린 밖으로 나와 걸었다. 같은 나이라서 금방 친해졌고 우린 친자매처럼 지냈다. 큰 번화가가 있는 동네의 토박이인 그 아이는 나에게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매번 갈 때마다 새로운 볼거리가 있는 그 거리에, 나는 좀처럼 익숙함을 느끼지 못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재잘거리는 그 아이, 상냥한 '친엄마' 밑에서 자란 그녀가 참 부러웠다. 동시에 나의 삶과 상황에 이질감을 느꼈다. 내가 태어난 곳도 새 이모의 딸과 같은 도시인데, 나에겐 슬픈 곳이라는 게 참 이상했다. 

본격적인 사춘기를 맞이한 나에게 그 도시와 계모, 그리고 지금도 진짜 아버지인지 믿을 수 없는 친아버지와의 삶은 지옥 같았다. 그래서 그 도시를 떠날 때까지 정을 붙일 것 하나 없이 이방인처럼 떠도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내가 그 도시를 떠날 즈음 새 이모의 딸도 그 도시를 떠났다. 새 이모가 이혼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사촌이 아니었다. 친한 친구로 지내기로 한 그녀는, 내가 이사한 서울에서 아주 먼 곳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는 가끔 만났지만 다른 도시였다. 매번 내가 그 애가 사는 도시를 방문했다. 

중고등학교 친구들도 대부분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면서 나는 그 도시와 완벽히 멀어졌다. 그 도시를 언급하거나 떠올리는 것은 졸업한 초중고나 태어난 도시를 말하거나 서류에 기재할 때뿐이었다. 그 도시는 내게 지명 혹은 단어일 뿐이었다. 그래서 10년 전, 출국을 앞두고 서류 구비를 위해 모교를 가야 했을 때, '그 도시'에 가야 한다는 것이 마치 서울에서 부산으로 억지로 끌려가는 것처럼 괴로워, 며칠을 미루고 미루다가 겨우 방문했다. 그리고 일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그 도시에서 탈출했다. 

'그 도시'는 나에게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 도시를 생각하며 울고 있다.

sunshine-from-forest

메말라가는 마음(감정)을 다시 박동하게 해준 그 동영상을 몇 번이나 반복해 시청하다가 결국 블로그에 글을 쓴다. 강하게 부정해 왔던 것을 인정하는 것은, 패배했다는 굴욕감을 주지만 동시에 반성과 해방 그리고 자유를 가져다준다. 모든 것은 필연이라고 믿는 나에게, 오늘의 사건은 인생의 새로운 장을 알리는 '기상 알람'이라고 믿는다. 마음이 정말 많이 나아졌다. 언젠가 한국에 방문하게 된다면, 남편에게 나의 살아온 발자취를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싶다. '그 도시', '나의 고향', 내가 보내고 이겨낸 '그 시간'들을...

오스트리아를 사랑하는, 오스트리아에 거주 중인 한국인.